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트린 드 메디시스 (문단 편집) == 평가 ==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국왕 [[앙리 2세]]의 [[왕비]]로 프랑스 전역을 휩쓴 [[위그노 전쟁]] 당시 파리에서 수천 명의 [[위그노]]들을 학살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었으나, 20세기부터의 시각으로는 학계에서 일관적으로 부정되고 있는 편[* G.F Young, Denis Crouzet, Jean-Louis Bourgeon, Thierry Wanegffelen 등]이다. 카트린이 대학살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가장 큰 원인은 훗날의 [[마리 앙투아네트]](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처럼 '''국민에게 인기가 없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학계의 시선과는 다르게 일반인들에게는 그냥 학살자로만 알려져 있는 편이다. 남편 앙리 2세의 사후 쇠약해진 왕권을 되살리기 위해 비인도적인 짓을 많이 저질렀으며 권력에 눈이 멀어, 피도 눈물도 없었던 여인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사건으로 인해 덮어씌워진 이미지이다. 이 문서의 개요와 본문만 해도 여러 번 학살의 주범이라는 식으로 수정된 적이 많다. 카트린은 '''평생 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의 갈등을 봉합하려 한 중재자'''로 살았으며, 아들들의 왕권과 [[발루아 왕조]]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녀의 정책은 비록 기만적이었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피와 음모로 얼룩지지는 않았다. 앞서 말했듯 카트린의 정책과 궁극적인 목표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화합을 바탕으로, 그 위에 [[발루아 왕조]]가 종파를 초월한 왕조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카트린의 정책은 실패했는데 첫 번째 이유는 자식들이 영 칠칠치 못한 데다가 자손도 남기지 못했던 탓이요, 두 번째 이유는 그녀 자신이 종교 갈등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에 있었다. [[피렌체 공화국|피렌체]] 출신의 카트린은 평생 종교적 열정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철저히 실리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가톨릭]]과 위그노 진영은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신앙으로 살아가는 이들이었기에 그녀가 제시한 '''[[가톨릭]]과 [[개신교]]가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청사진은 본질적으로 실리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 즉, 당시의 [[프랑스 왕국|프랑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카트린은 이 두 세력을 이용해 권력 기반으로 삼고자 평생을 노력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이 종교 갈등이 그나마 봉합된 것은 결국 프랑스 전역이 황폐화된 이후 [[앙리 4세]]의 치세에 이르러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